맹신자들

변화를 두려워 하고 보수적이 되어 가는 이유는 ‘미래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부자도 그럴 수 있지만, 극빈층도 그럴 수 있다. 지금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데 여기에 변화가 닥치면 가늘게 매달린 일상의 끈마저 끊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중 운동(mass movement)”을 디자인하는 이들에게 피라미드의 맨위, 맨아래는 대개 필요가 없다.

개혁은 불만 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의지 즉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 막연하고 과장된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아예 “절망”할 여유도 없는 이들은 부적합한 셈이다.

대중운동이란 불만을 응축하여 폭발시키는 기재일 터, 그 불만이 폭발하는 시점은 바로 경계선, ‘모퉁이 바로 뒤에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을 벌크로 주입하기 힘든 계층은 대중 운동에 맞지 않다. 현실감을 기꺼이 잃어 버리며 현실을 숭고한 행군의 한 부분으로 헌납해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춘들이 한국 기성 정치 집단들의 대중 운동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1951년에 쓴 이 책은 이렇듯 오늘날의 한국의 민중 양태를 독해하는데도 유효하다.

"아직 건설되지 않는 도시, 아직 가꿔지지 않은 정원을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치”게 만들어야 하고, 기존 집단 내 유대관계 즉 가족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어느 무엇 하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들을 위해 건설될 도시, 가꾸어질 정원 따위 애초에 안중에 없었으니까. 여기에 저출산 핵가족화, 다양성, 선점된 기회로 인한 궁핍한 답답함까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그들은 사뿐히 무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면 그 귀찮지 않음에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대중 운동은 설령 자유를 내걸었어도 기껏해야 단결과 자기희생을 통해 자유를 단념하게 만들 뿐.

저자의 통찰이 말하듯
창조자는
자존감이 있기에 대중운동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 손안에서 나날이 세계가 자라고 성장하는’ 촉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맹신자로 살지 않을 청춘의 특권을 기꺼이 그리고 경쾌하게 집어 들 때다. 
타인에 의해 주입되지 않은 스스로의 신념으로 앞으로의 도시, 앞으로의 정원을 창조해 갈 때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에 어떻게든 들어 가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

왜 청춘들이 대기업만을 선호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우리 상황이 조금 유별나기는 하다. 대다수 청춘이 공무원/대기업을 1차 목표로 하다 보니, 창의적 벤처에 영양이 돌지 않고, 이는 사회의 성장을 위해 치명적으로 안쓰러운 일. 

사실 청춘들 뭐라 할 것 없는 것이 이미 중소기업에 있는 이들도 기회를 노리는 것은 호시탐탐

이유는 간단: 대기업 정규직이야 말로 한국을 살아 가는데 있어 가장 합리적 선택이라 사회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고 있는 주동자들은 바로 우리 기성세대들인데,

  • 보편적 복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유일한 사회적 안전망은 ‘대기업 정규직’의 복리후생. 학자금, 의료보조 등 국가의 부조리를 대기업의 힘으로 벌충할 수 있다.
  • 일단 채용되면 사실상 해고가 힘들기에 좀비가 되어도 사실상 꽤 오랜 기간 연명 가능.
  • 좀비 상태 연봉 1억으로 5년만 버티더라도 자립 기반이 된다.

이와 같이 고용유연성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한 번 기득권이 되면 충분히 빨아 들일 수 있는데, 이 것이 달콤하기에 대기업은 점점 스스로 팽창한다.

  1. 대기업이 종래의 자영업 기반 및 중소기업 업태를 가리지 않고 진출.
  2. 대기업 정규직은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1을 설계. 실제 운영은 모두 비정규직으로 돌림.
  3. 정신차려 보니 그들이 퇴직 후 할만한 자영업들마저 모두 대기업과 경쟁하는 태세. 좀비 모드로 GOTO 1. 

전체 사회가 모두 이 구조하의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과점될 때까지 루프를 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것은 아마도 몇개의 그룹사에 의해 한국이 완성되는 과두(寡頭) 경제의 완성일 것이다. 21세기적 사회주의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허락된 세이프티넷을 사회 전체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운동은 “Be 정규직!”이 아니라 “非! 정규직”인 것이다.

고용유연성을 높이고, 그 대가로 남게 되는 사회적 잉여 가치로 기본소득(BI)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설계해 ‘다시 시작할 자유’를 주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사라지고 모두 정규직이 되는 세상?, 이렇게 무책임한 공상적 유토피아는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사실 중소기업 정규직도 ‘비정규직’이고, 해고가 자유로운 외국의 대다수의 Full-time employee도 ‘비정규직’이다.

언제든 회사는 쿨하게 떠날 수 있는 것, 대신 그렇게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도 사회와 공동체가 그들을 응원해 주는 것.

이 것이 한낱 꿈인 것을
우리들을 지켜 봐온 청춘들은 알고 있기에, 그렇게도
대기업을 선호하는 것이다.

현대 피라미드형 계급 구조-우리가 계급을 이야기할 때 떠 올려야 할 한 가지 그림.

지난 주말의 [한일 블라스트비트 심포지엄] 청년, 사회적 자본 안에서 스마트하게 살아가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흥미로웠다.

그 감흥은 다른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그 때 나눈 이야기 중 여러 의견을 주신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 보기로 합시다.

우리가 계급을 이야기할 때,
(특히 민주화 세대의 세례를 받았을 수록) 자본가(고용인)와 싸우는 노동자(피고용인)의 1차원적 구조로 계급 투쟁을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서글픈 고용인,
즉 자영업자가 될 수 있는 시대.
이들 영세 자본가들이 대기업 노동자에 비해
훨씬 힘든 삶을 살곤 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21세기적 계급 투쟁은 다른 방식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생산수단을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된 스마트 시대.

현대 피라미드형 계급 구조 – 우리가 계급을 이야기할 때 떠 올려야 할 한 가지 그림은 대충 이런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인간이 모인 사회와 조직의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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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라미드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위와 같은 계급차가 생긴 것, 즉 넘사벽이 생긴 것은 현대적 현상이다.
고도성장기, 피라미드가 커 나가고 있을 때는
해당 계급의 빈 공간을 아래로부터 항시 흡수해 채울 수 있었지만,
이 것이 멈추고 또한 새로운 피라미드도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위 그림에서 의외로 무서운 기득권은 바로 기획계급.
삼저호황에 힘입어 빠르게 운영,구현을 넘어 기획에 오를 수 있었고,
전후 경기부침에 따른 이득(예컨대 부동산 폭등)도 이 (시대) 계급이 독식한다.

  • 적어도 기획 계층은 “마르크스의 예언 대로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가설 “Efficiency Wages”에 의해 피라미드로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수준에서 임금이 결정되기 때문.
    현재 기획 계급 임금은 소득세 과표구간 최상위(연봉 8800만원 이상) 언저리. 88만원세대의 10배? 음, 진성 기획 계급이라면 100배도 OK.
    이들의 정치 성향은 좌우파 어디에도 공히 속할 수 있다.
  • 그 다음 깊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구현 계층. 바로 위의 “도박판의 설계자”들이 그려 놓은 대로 구현을 하라고는 하는데… 아닌 것 같은 느낌. 윗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이미 포화. 그만 두자니 피라미드 밖은 암흑?.
  • 그리고 운영 계층. 어떤 피라미드든지 속하기만 하면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차상위 계급은 커녕 바로 윗 계급과도 제도적 계급격차 완성중.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있는 이 상황에 이론상 올라갈 수 있다며 위로하며 경쟁을 권유. “아프니까 운영?”

피라미드를 벗어난 독립 계급으로 Practice(legal/medical)가 한 때 인기를 얻었으나, 이들의 피라미드화도 급가속화되고 있기에 앞으로는 알 수 없다.

계급화의 부작용은 이 시대에 우리 삶에 여러모로 저며 올 텐데, 오늘은 그 중 하나만.

계급에 고착되다 보니 수직으로 관통하려는 용기,
즉 “디테일을 아는 설계자가 소유를 하는 현상”,
바꿔 말하면 스타트업이 무모한 일이 되어 간다는 점.

참, 기획계급이라고 해도 안도하기에는 이르다. 이미 주택부금과 자녀들 사교육비로 연비가 나쁜 상태로, 언젠가 느즈막히 피라미드를 벗어 나는 날, 운영도 구현도 할 줄 모르면서 피라미드의 로고마저 잃은 노인의 기획에 귀 기울여 주는 이들은 많지 않을 테니.

 

그리하여 지난 주, 피라미드와 좀비의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 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럼 또 다음 기회에.  🙂

또 한 번의 끝, 다시 찾아 온 시작.

어제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의 마지막 근무일. 꽤 길었는데 지금 돌아 보니 정말 바람같이 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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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영원한 자유인”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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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써 준 석별의 한 마디들.

그리고 다른팀 팀장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사 준 Lamy 만년필, 지난날의 팀원들이 또 한 푼 한 푼 모아서 사 준 Waterman 만년필. (오호, IBM 퇴사 선물 Parker 만년필이 고장 난 시점에 생큐!)

 

과분한 배웅, 런치로 디너로 이별도 추억으로 만들어 준 동료들.

 

그리고 정말 고마운 것은

이 회사에서 만난 정말 멋진 동료들,
그리고 이 회사 덕에 알게 된 정말 멋진 파트너들.
모두와 소중히 간직하고픈 나날들.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정글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지만,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를 따라, 
늘 떠들던 
그 자유를 베타 테스팅해 보기 위해,
또한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유를 탐색하는 여정을 위해

그게 뭔지 궁금하기에, 
마을을 떠납니다. 

“어, 어느 회사로 가는데?”
“아니요, 광야로 갑니다.”

 

작가로서, 만화가로서, 그리고 개발자로서의 야성을 믿고.

 

두근두근, 그리고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고마움. 

함께 일하고 또 생각을 나눌 수 있었기에

저를 믿어준 여러분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정치 지평

좌파, 우파, 진보, 보수의 용어가 남발되는 정치의 계절이 또다시 서서히 도래하고 있다.

원래 상식적인 (굳이 Bobbio를 읽지 않더라도) 좌파와 우파란

  • 우파: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 시장의 순기능을 신뢰하기에 가진 자의 자유 또한 존중.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에서 온다고 믿음. 예) 신자유주의
  • 좌파: 인간 사회는 노력하여 평등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부의 재분배에서 계급 척결까지 가진 자의 책임 추구. 보편적 복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미덕이라 믿음. 예) 사민/사회/공산주의

즉 자본주의의 상징들(가진 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그 관건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좌우파는 이런 느낌? 60년째 화개장터 기준?

한편, 진보와 보수란 좌/우파와 급기야 동의어로 활용되는데, 일단 그 자체가 스스로 설명적이므로 사전적 정의로 되돌아 가보면

  • 보수: 지금이 딱 좋아!
  • 진보: 아냐, 딱 좋지 않아!

이 것이 전부이기에, 좌/우파와 진보/보수는 동의어가 아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시절로 돌아 가 보면 보수가 좌파였을 것이고, 진보가 우파였을 것.

보수란 현재 사회의 가치를 존중하며 계승하려는 이들이고, 진보란 더 나은 사회의 가치를 제안하고 혁명하려는 이들.

그러나 한국에서의 보수, 진보는 이런 느낌? 뭘 존중하고 계승하는지 뭘 제안하고 혁명하려는지 상당히 헷갈림

  • 보수: 부자감세. 대기업 친화. 동시에 사회주의적 대규모 공공사업. 정부의 개입과 간섭.
  • 진보: 노조 지지. 고용 유동성 반대, 일부 친북, 동시에 FTA 등 자유주의적 정책도 감행했으나 기본은 큰 정부.

이렇게 뒤엉켜 있는데 대개의 언론은 좌/우파, 진보/보수를 그냥 동의어로 쓰고 있으니, 국민의 판단에 또 다시 먹구름.

1차원에서 헷갈릴 때는 2차원으로 그려보면 실마리가 풀리곤 한다. 그런데 이 것은 뫼비우스의 띠?

오늘의 숙제: 스스로 지지하는 정당을 위의 도식에서 체크해 보고(예제로 타국 정당 참고), 한국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방향성을 체크해 봅시다.

왜 정부는 “한국형”의 꿈을 또 다시 꾸는가?

“한국형’ 모바일 OS를 만들겠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정부 개입을 보는 시선은 하나 같이 싸늘하다.

그럼에도 왜 정부는 그러한 구태를 여전히 버리지 못할까?

여기에는 건국 이래 한국 정부의 기조가 유교적 덕치주의에 기반할 수 밖에 없었던 경위가 있다. 즉 계몽적 군자가 백성을 인도한다는 설정인데, 한국적 관료제는 전후 한국 경제 부흥의 리더의 역할을 분명히 했다. 가장 유능한 이들이 고시를 거쳐 최고 엘리트로 봉사했던 것. 실제로 한반도에서는 정부가 이끌고 중후장대형 기업군이 뒤따르며 심시티를 일으켰는데, 이에 실제 참여했던 이들의 무용담은 육성으로 들으면 그 자체로 굉장한 마력이 있어 그 체험을 직접 겪은 이들이 한국형 토건 케인지안이 되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이다.

따라서 정부가 대기업들과 포메이션을 형성하려는 습성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관료 조직처럼 고용 안정성이 뛰어난 곳이 없고, 또 낙하산으로 예우를 받을 수도 있기에, 5개년 계획을 3번 돌리는 장기적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대한민국” 그 자체가 거대한 영속적 “종합 기업군”이었고, 정부는 그 “컨트롤 타워”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과거의 성공 체험에 최적화된 관료 조직은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사회에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 기회를 방해해 버리고 만다. 엄청난 일들이 엄청나게 짧은 사이클로 일어 나는 환경 속에서, WIPI, 공인인증 등 정부발 혁신은 대부분 장애가 되어 버린다. 꿈은 컸을지 모르나 현실은 각종 인허가를 통한 통제라는 정부의 습성이 IT에 파급한 사례가 되고 만 셈이다.

특히 소프트웨어란 정부발 산업 정책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IT 버블과 스마트 시대로 이어지며 글로벌하게 증명된다. 덩달아 대다수 IT 산업 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관료의 위상도 저하될 수 밖에 없었고, 두뇌회전이 빠른 정치권은 정부의 입김이 잘 듣고 또 체면이 설 수 있는, 즉 사진이 잘 나오는, 토건 및 중공업으로 산업 정책 포커스를 유도한다. 그 것이 지금의 한국이다.

그러나 따라가야 할 국가모델이 명확히 있고, 리소스(인재+자재)의 동원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는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데, 그 이유는 한국 사회가 성장을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원인이자 결과이다.

이 시점에서 등장해야 하는 것은 드러커를 읽지 않아도 직감으로 알 수 있듯 이노베이션이지만, 정부에서 이 일이 시작되는 일은 기적이다. 왜냐하면 방임적 자유란 정부의 적(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임적 자유는 파괴적 혁신의 씨앗이다.

정부의 강점은 재해나 전쟁과 같이 민간 섹터 전체에 향후 어떠한 불편과 심지어 피해가 가도 리소스의 총동원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십분 발휘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역할과 규모를 줄여야 하지만, 이런,.. 여기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군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마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트위터에서 ‘촌락주의’에 대해 이야기 드린 바에 대해서 더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관련 내용을

  • 개인의 자유
  • 이어짐의 연대

의 소중함의 관점에서 모 컨퍼런스의 기조 강연에서 말씀 나눈 바가 기억이 나서 공개합니다. (앞에 10분 가량 약간 잘렸습니다만, 인트로 및 아시는 내용으로 별 내용 없습니다. ) RSS에서 MP3가 보이지 않을 경우 링크.

 

7page부터 보시면 됩니다.

김영갑과 마에다 신조, 그리고 진화심리학

 

어떤 사진은 그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게 만든다. 그리고 표현하기 힘든, 그리움에 가까운 어떤 감정에,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곤 한다.

오늘 문득 그런 상황이 두 번 정도 있었음을 기억하게 되었다.

하나는 제주의 풍경을 찍은 김영갑의 사진에서였고,
또 하나는 북해도의 풍광을 찍은 마에다 신조의 사진에서였다.

이 둘은 모두 우연히 고국의 어느 땅 운명적 spot과 조우하고, 그 곳과 사랑에 빠져, 그 곳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운 후, 그 곳에 두모악과 타쿠신칸을 남겨 자신이 바라 보던 그 세계를 우리들의 마음에까지 담아 주었다.

제주의 오름에,
북해도의 언덕(丘)에

우리와 무관하다 생각하던 타향의 그 곳에

우리의 근원적 그리움이 있음을 그렇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사진의 힘이었다. 

 

그런데 이 그리움이 근원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의 책에 나와 있는데, 인류는 진화적 조상들이 수백만년동안 생활해 온 그 어떤 풍경에 선천적으로 이끌리도록 디자인되었을지 모른다는 것.

제주의 오름도 북해도의 언덕도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 포근한 안정감을 준다. 인류란 어쩌면 그러한 비옥하면서도 탁 트인 지형에 끌릴 수 밖에 없도록 프로그램된 것이라면, 도시가 키운 두 명의 사진가도 그 부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갑자기

제주도의 오름과 비에이의 언덕이 그립다.

「 Make: 」

예전부터 한 사회의 다양성을 알아 보는 심정적 지표로 어떤 종류의 매체가 존재하는지 그 유무를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예를 들자면 Make:

짧게 설명하자만 DIY 잡지인데, 그 테마가 잉여롭게 유쾌하다. DIY라 하면 건실한 가정에서나 어울리는 (대략 고액연봉에 일찍 퇴근하는 자상한 남편이 와이프를 위한 가구를 DIY한다거나) 것일법한데, 여기서의 DIY는 도대체 이걸 꼭 왜 해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다.

줄이자면 이미 사태는 Geek의 원더랜드를 모두 함께 꿈꾸자는 상황.  

어쨌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곧 다양성이 넘치는 사회이고,
조만간 Make: Seoul Meeting 2011 이런 것 벌어졌으면 좋겠다. 꼭 참석할 것이고, 필요하면 사회도 볼 의사가 있다.

아래는 짤방인데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른 어느 Geek girl의 비디오안의 Make: 포스터가 눈에 들어와서…

「 프로그래머의 길, 멘토에게 묻다 」

이 책은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디딘 이들을 위한 취업 선물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프로그래머에서 한없이 멀어져 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

요리라던가 노래라던가 무예와 같이
인간 본연의 양태에 가까운 기량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숙성되어 가지만,
휴가만 다녀와도 패스워드가 기억 나지 않곤 하는 것이 낯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인지적 적응력,

세월의 흐름과 함께 프로그래밍 능력이 놀라운 속도로 사그라져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차려 보면 이도 저도 아닌 소위 ‘중간 관리자’.

이 책이 담고 있는 삶의 패턴 중 꽤 오랜 기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Be the worst (가장 뒤떨어진 이가 되라) 였다.

즉, 따라가기 허덕일 정도로 뛰어나고 배울 것이 있는 이들과 함께 지내라는 것. Pat Metheny가 젊은 뮤지션들에게 건넨 충고라는데,

골목 대장에 만족하는 수많은 이들, 뛰어난 이들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이들에게
낯설지만 뛰어난 이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환경에 가까스로 들어 가는 불편한 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었다.

회사에서 우리를 키우는 것 8할은
잡담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일 우리는 누구와 어떤 잡담을 할까, 
멘토에게 묻는다는 것, 그런 건 뭐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