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진로 고민을 듣는다.

무책임하게도, 농담 삼아 이야기해 준다. 상대방도 내게서 진지한 대답 기대하지 않았을거야.

"이상계로 가세요."

‘현실계’, ‘이상계’, ‘환상계’의 세계관은 이제 더 이상 추상적 개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프로그래머의 인생에 있어서도...

현실계 기업들이 스스로를 위한 작품을 직접 만들어 낸다는 감각을 상실한다면, 프로그래머가 되고픈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충고란 “현실계를 피하라”일 것이다. 비겁할지라도 피함으로써, 이 구조를 뜯어 고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상계’에는 기획이라는 현업은 있지만, 개발은 개발자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 나는 갑을병정의 방만한 가치 누수의 사치를 부리며 성공을 유지한 닷컴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최소한 프로그래머의 가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게임 업계에서 한 명의 스타 프로그래머가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뚝 설 패기가 있는 프로그래머라면 이상계로, 그리고 환상계로 나아가는 편이 확률적으로 세계를 바꿀 공산이 크다.

기본적으로 소프트웨어는 자기가 쓰고픈 것을, 즉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 내 패키지, 내 서비스, 그리고 내 업무. 그러나 우리는 어디서 배운 버릇인지 저가 입찰에 의한 발주를 하고, 모든 것을 남에게 떠 맡긴다. 그리고 그 뜬금없는 외주는 다시 반복적 하도급이 된다. 결국 가치를 만들어 내는 프로그래머는 ‘하청’ 구조 가장 밑바닥의 약자가 되어 ‘과기처단가표’에 연연하는 떠돌이 삶을 살게 된다. 갑을병정의 폭포수를 타고 내려가는 엔터프라이즈 SI의 아수라 속에서 프로그래머는 자기 환멸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소프트웨어 후진국일수록 두드러지는 산업 구조다.

하청구조의 밑바닥에서 남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에 정성과 혼이 들어 가기 어렵다. 어쩔 수 없는 인간 심리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떠나갈 이들의 어쩔 수 없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는 혁신의 도구로는 여전히 모자란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기적적으로 그럭저럭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게 됨을 알게 된 기업들은 굳이 프로그래머를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이 악순환은 반복되는 것이다. 이 것이 ‘현실계’다.

그렇다면. 정말 현실계란 피해야 할까? 아니, 나는 바꾸고 싶다. 이 곳을. 모두와 함께.

문득 떠오르는 이상적인 ‘현실계’의 모습은 이렇다. 적극적으로 개발자를 영입하여 인력을 키우는 현실 기업들에, 백발 성성한 노장 프로그래머가 컨설턴트로 외주를 받아 도움을 주는 세계. 그 곳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소박한 ‘현실계’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