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듦의 기쁨

 

 

인류는 위대함을 정의함에 있어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그 척도로 삼았다. 기계를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꿈과 비전을 만들고… 모르긴 몰라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란 평형과 질서와 편안을 깨뜨리고 몸과 정신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귀찮고도 위험한 일임을 인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만듦의 숭고함을 지킬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아니 어쩌면 유전적으로 진화해 온 듯하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처음 손가락을 놀려 입력한 무언가가 내가 예측과 계산한 대로 화면에 출력이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그 잔잔하지만 충만한 기쁨을. 혹자에게는 그 것은 9인치 그린 스크린이었을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그 것이 Excel의 VBA일 수도, 또 다른 어느 누구에게 그 것은 HTML의 코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내 원하는 만큼 내가 뜻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 준 도구와 공간, 컴퓨터와 네트워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리고 산업 사회의 격변기에 망각을 강요당했던 원초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유전자 어딘가가 기억하는 쾌감을 맛보게 해 준 고마운 해방구다.

친애하는 송씨는 이 쾌감을 ‘프로그래머의 오르가즘’이라 표현했다. 어떻게 형용할 지의 차이일 뿐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두 비슷한 느낌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눈감으면 10대의 어느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 너무나도 선명한 느낌은 저장된 기억이 아니라 마음 어딘가에 각인된 것이라 여겨질 정도다. 마치 실사와 같은 이 느낌 속에서, TV에서는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옆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컴퓨터 옆에서 행복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풍족하지 못한 10대였지만, “이대로라면, 이 정도의 행복이라면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추어도 좋아.”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풍경 자체는 나에게는 묘하게 선명한 느낌으로 늘 떠오른다.

지금껏 수많은 현장에서 수많은 개발자를 만났고, 또 수많은 기업과 수많은 컴퓨터와 만났다. 그렇지만 나와 그들은 그 만듦의 기쁨을 잊어 버리고 있었다. 언제 망각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요즈음 모든 신경은 이 느낌과 쾌감과 기억을 모두 함께 되찾는 일을 둘러싸고 맴돌고 있다. 어느 날 우리 삶이 스러져 갈 때 나의 기억에는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그 것은 내가 만든 무언가와 그 것을 만들 때의 기억일 것이다. 그 것이 일기든 소설이든 노래든 시든 손자손녀든 5층 석탑이든… 쭈그리고 앉아 눈을 감아 본다.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에 할당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만큼일까?

가장 직접적 창조자인 개발자의 사회적 지위나 처우가 나빠진다고 고민하는 일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위태로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풀어 내기 위해 수 없는 사고 실험과 망상과 시뮬레이션을 해보지만 결국 나는 추억 어딘가로 회귀하고 있을 뿐이다.

‘낭만IT’의 어수룩한 방황도 결국 그런 것일 것이다. 그 낭만시대를 그 낭만성을 그 낭만주의를 털어 내지 못한 채 방황은 계속된다. 자조적이다가도 참지 못해 구조개혁을 부르짖고 좌충우돌해 보지만, 이미 필요충분한 잉여 생산력을 확보한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이들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평가하고 관리하고 단죄하는 이들이 회로의 중앙임을 인정하기 싫어 부리는 어리광과 같은 일임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는, 중독에 가까운 치유 불가능한 낭만주의 속을 나는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Comments

“만듦의 기쁨”의 6개의 생각

  1. 언제더라.. 독수리 타법으로 힘겹게 타이핑해서 간단한 데이터를 도스창에 그래프 비슷하게 찍었을 때, 와, 이런 걸 해볼 수 있구나 감탄했던 순간이.. 제가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던 순간이었을 거라 생각되네요. ^^

  2. 저는 HTML 만들고 익스플로로러 불러왔을 때. 자바 스크립트로 이벤트 첨 만들어 봤을 때. 이거 내 길이구나..생각했는데,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함. 델파이 배우다 좌절. 칫. 델파이 따위 배우다..포기하다니. 바보짓.

  3. 안녕하세요..

    웹2.0 너무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어제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아직 다읽지 못했어요..

    롱테일 경제학을 보면서.. 조금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에 보게 되었구요.. 볼케이노효과도 알게되었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자주 들러서 좋은정보 많이 보고 갈게요.. 아~~ 그리고 제가 홈페이지 트랙백걸어서 링크 걸게요!

    자주 들러야 할거 같거든요.

  4. 자바2는 한 6년전에 배우다가 책을 잃어버린 이후로 안하고…
    VB는 고등학교 들어간 이후로 안하고…
    C계열은 대학 군휴학하고나서 한자도 안봤더니…

    세가지를 모두 까먹어 버렸습니다…

  5. 글을 참 잘 쓰시네요 ^^;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게 모두를 이곳까지 데려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또 좋은글 기대하겠습니다~

  6. 저도 이 프로그래머의 오르가즘을 느꼈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말이죠. 생각했던 데로의 프로그램이 돌아가던 순간의 그 희열.. 언제 다시 느껴졸런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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