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족속

잊고 있었는데,
나는 실은….
그래, 어차피 자신의 정체성 따위 현대인은 자주 잊곤 하니까.
어쨌거나, 나는 실은 어셈블리어로 프로그램을 짜곤 했던 하드코어 프로그래머였다.

내가 IT 업계에
우울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내가
이 족속들의 정서를 털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갑자기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지겹게 쏟아지는 창 밖의 비와도 무관하며, 극도로 불안한 요즈음의 정서 상태와는 더더욱 상관없다.

이 족속 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많은 족속들이다.
자신의 논리가 현실에 적용되어 일으키는 불꽃같은 흥분을 알아 버린 나머지
교섭도, 타협도, 사기도, 허풍도
구사할 줄 모르니,
이 강력한 현대인의 재능을 발휘할 줄 모르니. 어쩌면 이렇게 바보같이도.

왜 남들처럼
대강 빨갛고 노랗게 차트를 그려, 대강 교섭하고 타협하고, 대강 남을 부려 대강 시스템을 만들어내는데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나…

왜 남들처럼
무조건 YES를 남발하며 수주해 오고 그것 만으로 기뻐할 줄 모르나…

아마추어 아니잖어.
프로답게 차갑게 싸늘하게.

왜 그렇게 못하니.

왜?

이 족속들은 그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인 걸.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 고마웠다고 악수하며 웃는 자신을 믿어 준 고객의 모습.

그 웃음을 이루는 것이 뭔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야.

Comments

“어떤 족속”의 1개의 생각

  1. 우연히 지나가다가 뭔가 필이 꽂히는 글이어서 망설이다가 발자국을 남깁니다. 정확히 말하면 같은 느낌을 가졌던, 비슷한 우울함을 느꼈던 동족의 끌림때문에..
    외로운 배들이 떠다니는 바다위에서 약간 가까운 거리앞을 지나가는 다른 배에 손을 흔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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