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가슴에 묻고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이유

벌써 3년전이 된 3.11 일본 대지진. 그 후 한 일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절망적 사고는 큰 아픔이지만 어쩌면 이 나라의 젊은 세대를 깨우는 일을 하리라고. 
어른들의 기득권에 맡겨 둔 국가, 그 부조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우리의 4월이 그 3월에 비슷해 보였다. 
행정과 정치는 온갖 변명 속에 속수무책 우왕좌왕했으며, 
면피를 위한 기자회견부터 무의미한 현장방문까지 ‘퍼포먼스’에 매진하며 
어떻게 하면 선거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이 그럴듯하게 보일지 분주했다. 

대자연의 재해과 테러와 같은 가공할 두려움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지만
평온에 감춰진 기득권의 민낯을 드러내게 한다. 
사람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은 그 져버린 신뢰와 실망의 크기가 된다. 
일본도 미국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4월은  …
재해도 테러도 아닌, 너무 저질이고 너무 찌질해서 너무도 끔찍했다. 

진원지와 적은 어디인가…, 드러난 이들은 수가 뻔히 보이는 둔갑만 계속 한다. 
너무나도 많은 공범이 있으며, 최종보스라고 생각했던 이 뒤에는 또 다른 배후가 있다. 
양파껍질은 끝도 없이 떨어져 나간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태연자약 벌어지고 그것이 당연시 되어 온 세상, 그런 곳이 실재하고 있었던 것에 소름이 돋는다. 
그 곳은 대한민국.
정부든, 정당이든, 회사든, 종교든, 심지어 배 한척이든 한줌의 조직이라도 그 키를 잡은 인간군상들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본성을 목도한 이상,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드러나지 않은 곳은, 드러날 리 없는 곳은 도대체 어떤 아수라일까. 왜 늘 사람이 죽어야만 그리고 국민의 공분이 있어야만, 무언가 겨우 밝혀지는 것인가.

절대로 리더가 되서는 안되는 수준의 사람들이 리더를 하고 있고,
이들의 완장과 자리와 이권을 보전하기 위해 짬짜미가 횡행하고,
그 조직의 소속원들은 
영혼을 잃은 채 
“에이, 이번에도 하던 대로 하고, 다음부터 원칙대로 합시다.”
“역시… 그럴까요?”
“그럼 당연하지, 왜 이래 사람이 순진해가지고, 샌님처럼.”
“하지만…”
“그럼, 그게 관행이야. 그리고 그래야지 조직도 살고 윗선에도 무리가 안가. 다 그렇게 되어 있는거야. “

사회 곳곳 온통 세월호로 가득한 대한민국. 어느새 그 난파선의 공범 승무원이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국민들은 가족과 사회와 다음 세대라는 승객들이 눈에 밟혀, 
좀처럼 슬픔을 가슴에 묻고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것이다. 

오늘의 아픔이 이 난파선에 울리는 알람이 되어야만…
그것이 이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일텐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 일본인이 한 말을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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